"갭이어(Gap year) : 학업을 병행하거나 잠시 중단하고 봉사, 여행, 진로 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의 다양한 활동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통해 향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시간" -위키백과-
십여년간의 직장생활에 쉼표를 찍으려는 어느 날, 기어코 이 단어를 찾아냈다. 그래, 이런 멋진 말이 있었다. 갭이어라니! 영어로 표기하면 적어도 '멋짐+100' 을 획득하는 요상한심적 잣대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내 퇴사가 초라해지지 않을 근사한 이유는 될 수 있었다.
그래, 난 쉬는게 아니고 갭이어를 갖는거야!
그니까.. 난 그만두는게 아니고 육아에 집중하기 위해서 잠시 쉬겠다는 거지
아니 그니까 쉬겠다는게 아니고.... 다.. 다시 일할 거니까! 그 전까지 아이도 돌보고 살림도 하는거야. 어린이일 때는 엄마가 함께 있는게 좋다잖아~그니까 내말은...알다시피 회사도 멀어졌고 출장도 잦고, 또또...
퇴사를 합리화(?)하기 위해 내가 풀었던 '썰'은 대강 이러하다. 불과 몇 개월의 여유만을 주고 회사는 갑작스러운 이전을 통보, 왕복 한 시간 걸리던 통근 시간은 세 시간 가까이 늘어났다. 아기 엄마에게 해외 출장을 제외해 주던 배려는 부족한 일손과 바삐 돌아가는 상황으로 옛 말이 되었고, 설상 가상으로 1년 넘게 근무해 왔던 입주 시터는 역시 ‘남은 남이다’ 라는 뼈 아픈 교훈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런 현실이 걷잡을 수 없이 싫어진 어느 날, 나는 그렇게 자발적 비경제인구가 되었다.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사실 이 모든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우선 이전 시터가 사라진 후 새로 찾은 출퇴근 시터 이모님은 훨씬 더 좋은 분이었다. 때 마침 국공립 어린이집에서는 빈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고, 내가 적응만 잘 한다면 육아 환경은 오히려 더 나아진 셈이었다. 또한 우리팀은 다른 팀보다도 워킹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팀으로, (물론 잦은 육아휴직, 출산으로 인한 공석문제로) 팀장님의 배려가 예전같지는 않았지만 왠만한 것은 합리적으로 이해해 주실 수 있는 분이었다. 남편 또한 육아, 가사 분담에 매우 적극적인 스타일이고 말이다. 뭐 통근 시간이야, 힘듦의 연속이었지만 반년이 넘는 시간동안 어느 정도 적응해가고 있지 않았던가.
냉정하게 말하자면 내가 회사를 그만둘 이유는 없었다. 때문에 갭이어다, 휴지기다 라는 온갖 멋진 말로 나의 선택을 포장하려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사실 단순했다. 물론 몸과 마음이 지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변화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욕심을 따라 시도한 몇 번의 도전은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나는 이미 축 난 몸과 마음으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일에 임하는 열정보다는 빈 껍데기만 남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직하기 전에 퇴사한 상태면 절대 안된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그러기에 내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낸 이후였다.
그리하여 내게 맡겨졌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직후, 나는 퇴사를 선언했다. 세상이 경단녀라 부르거나 말거나. 돌이켜보면 내가 해 왔던 몇 번의 도전은 공교롭게도 모두 무소속일 때 성사되지 않았던가. 이미 '공백기'에 대해 헤드헌터들에게 물어 뜯겨본 맷집이 있는건지 (물론 그 때는 어렸고 대리급을 원하는 오퍼가 차고 넘쳤기에 가능했겠지만) 무모하게도 이번에도 그렇게 쉬어가기로 했다.
지금 그만두면...다시 일 찾기 어려울텐데, 알잖아 애 엄마가 재취업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우리 집사람도 그 때 회사 그만둔거 엄청 후회해...그리고 나서 다시 기회찾기가 힘들거든
모르지 않는다. 암요, 암요, 잘 알다마다요.
그런데도 내가 꼭 쉬어가고 싶다면 어떡하죠...? 이런 진심을 내비치지 못하고 나는 그저 아이 뒤로 숨어 근근이 퇴직 인사를 전하던 어느 날, 함께 일한 적이 있는 회사분에게 이런 답메일이 왔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시 말에서 내려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휴식을 한대.
지금까지 너무 빨리 달려와서 영혼이 뒤쫓아오지 못했을까봐 쉬면서 기다려 주는거야.
먹먹했다. 육아 때문에, 아이 때문에 구구절절한 핑계를 대지 않고도 어쩐지 내 마음을 알아준 기분이었다. 그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지. 인생은 누가 먼저 피니시라인에 도착하는지를 두고 달리는 경주도 아니고 마라톤도 아니다. 자기만의 광야에서, 자기만의 방향과 속도로 가는 것. 때로는 뛸 수도 때로는 걸을 수도 때로는 그저 쉴 수도 있다.
지나놓고 보니 조금 천천히 가도 삶은 살아지고 당도하는 길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2018년 봄, 그렇게 나는 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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