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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 이야기/워킹맘, 쉬고 왔습니다

하이힐과 슬립온, 그 어디쯤

by 척척이맘 2021. 5. 11.

2018년, 퇴사자의 어느 일상

 

따박따박 출근해야 할 곳이 사라진 일상에서 유일하게 시간을 맞춰야 하는 일과, 바로 아이의 등/하원이다. 하루 시간  '공식적인' 외 준비를 하기 위해  머리를 감고 단장한다.  오늘의 코디는 보이프렌드핏의 청바지, 멋스러운 프릴이 달려있는 블라우스에 걸친 핑크 무스탕 자킷 그리고 비비크림을 살짝 덧바른 뽀얀 피부 연출과 진주 귀걸이, 거기에 에코룩스러운 슬립온이다.

 

 한껏(?) 차려입고 아이와 함께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말 그대로 '파자마' 차림의 엄마가 노란 버스에 딸을 태우며 손 흔드는 모습을 보인다. 품 안에 또 다른 아기를 안고서. 꽤 쌀쌀한 아침이었는데 얇디 얇은 7부 파자마 바지와 슬리퍼 차림이 애처로웠다. 아이 둘의 육아가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도 잠깐, 비열하게도 동시에 묘한 쾌감이 밀려온다. 좋아, 자기관리에 성공한 엄마의 모습이야. 만족스러워. 

  하지만 그 쾌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렇게 꾸며입고 밖에 머무는 시간은 채 30분도 되지 않았다. 돌아오는 곳은 결국 아무도 없는 공간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널브러진 장난감들을 치우고 청소를 시작하니 제멋대로 화려하게 뻗어나간 프릴레이스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움직임에 청바지 무릎은 튀어나오기 일보직전이다. 대강 청소를 끝내고 잠시 눈좀 붙이고 싶어서 몸을 뉘이니 콕콕 찔러대는 귀걸이는 또 얼마나 거추장스러운가. 대관절 누가 본다고 이렇게 부산스럽게 준비하고 수선을 떨었는지...짧은 한숨을 토해낸다. 

 문득 친구 N의 말이 떠오른다. 그녀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박사를 마치고 한 대학에서 연구 교수 자리를 얻은 전도유망한 여성이다. 돌쟁이 딸을 키우는 엄마이기도 하다. 일전에 내가 퇴사에 대해 고민을 털어놨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번에 어린이집 엄마들끼리 등원시키고 나서 모이기로 했는데,  나랑 휴직 중인 다른 엄마는 오히려 대충 챙겨입고 갔거든? 근데 전업맘인 누구 엄마는 그 사이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잔뜩 꾸미고 왔더라. 뭔가 괜히 주눅들까봐 더 꾸미고 온 것 같고 말이야"

아뿔싸. 이거 지나놓고 보니 내 얘기잖아?!

회사의 녹을 먹고 있던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들렸던 이야기였다. "그래, 집에만 있으니 일하는 엄마들에게 뒤쳐져 보이지 않으려고 그랬나보지" 도도하게 넘어갔다.  그런데 기약없이 '경단녀'가 된 내가 곱씹어보니 은근 부아가 치밀었다. 뭐야, 왜 자격지심이 있는 자로 판단하지? 원래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종이 한 장보다 얄팍한 계기로 백팔십도 달라질 수 있다.  내가 그 상황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기 전에는 땅에서 전해 오는 느낌을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다. 워킹맘의 '하이힐' 을 신었을 때 나는 소위 워킹맘vs. 전업주부를 둘러싼 세상의 편견을 은근히 말리는 척 즐겼음을 고백한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렇게라도 믿고 싶었던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미치게 부러워서!!  한창 일에 지치고 치여 있을 때 차라리 그런 생각이라도 해야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정말 우울의 최고조를 달렸을 때는 거대한 빌딩의 정문이 괴물의 입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번 사람들을 흡입했다 뱉어내는. 은행 한번 갈 여유 없던 시절, 잠시잠깐 나온 바깥세상에서 유유히 유모차를 밀며 도시 한복판 쇼핑을 즐기는 이들이 너무 부러웠고 아이와의 시간, 한낮의 달콤한 잠...평일 오전의 여유...정말이지 동경하는 삶 그 자체였다.  

 

하이힐을 신고 달리기까지 해야했다니...불쌍한 파커언니....

 하지만  '슬립온' 으로 갈아 신고보니 이 또한 마냥 편치만은 않다. 시간이 주체할 수 없이 늘어난 것 같지만 동시에 매 분 매 초가 내 책임이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면 혼자 있는 시간도 그리 여유랄건 없다. 몸을 바삐 움직여도 허투로 보낸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돈을 써서 쉽게 해치운 온갖 정리와 청소가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탈출구 없는 또다른 무한 루프로 들어온 듯한 기분을 새삼스레 느낀다. 

  양 쪽 다 신어본 오늘의 나의 결론은 이렇다. 이제 다른 신발의 착화감에 대해 섣불리 상상하지 말고 지금 신고 있는 신발에 집중하자는 것. 내가 이 신발을 고른 이유를 복기하며 신을 수 있을 때 닳도록 신어보자는 것. 

 그건 그렇고, 그래서 내일도 꾸미고 나갈거냐고? 물론이다.  스스로를 가꾸면서 느끼는 에너지를 사랑하니까. 그게 '회사' 로의 출근길이건 '어린이집' 으로의 짧은 외출이건 간에 시작을 여는 건 같지 아니한가.  내가 만족스럽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내가 좋은 신발이라고 믿는다면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을 믿기에. 그곳이 직장이든 집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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