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요즘 아이들 팔할은 그게 뭔지 되물을 것이다. 비행사란 어엿한 직업을 갖고 있는 뽀로로나 크리에이터인지 뭐시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읊조리는 비대한 몸집 소유자 펭수에 빠진 아이들이 나를 알턱이 없다. 머나먼 남극으로부터 한반도로 이어지는 이른바 '빙하로드'를 닦으며 진출의 물꼬를 튼 자가 바로 이 몸인데도 말이다.

각설하고 나는 한국에 둥지를 튼 후 서울의 한 작은 문방구를 거쳐 한 소녀의 집에 오게 되었다. 편의상 나는 그를 '둘리 어멈'으로 부르기로 한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멈은 여덟살인지 아홉살인지 한창 팔팔한 어린 소녀였다. 까르르까르르 웃어대며 유독 장난기가 많았다. 옆 짝꿍에게 소근대는 소리가 답답하다며 쩌렁쩌렁 소리지르다가 벌을 받기도 하고, 최다 틀려온 산수 시험지가 행여 들킬 까 서랍 속에 꼭꼭 숨겨두다가 혼나기도 하는, 개구쟁이 소녀였다. 어멈은 어느 날 몇 가닥 없는 내 머리를 열심히 빗질해주다가 잠시 나를 전구 스탠드 아래에 두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런데, 말이다. LED 가 아닌 90 년대의 백열 스탠드 전등은 어찌나 발열량이 센지, 어디서 솔솔 타는 냄새가 나더라니 그게 내 머리통일줄이야... 몇 가닥 안남은 내 머리를 홀랑 태워버리고 이마에는 딱딱한 탄 자국이 훈장처럼 남았다.
말괄량이 초등학교 시절과는 달리, 사춘기로 접어든 어멈의 학창 시절은 비교적 조용했다. 어릴 때 패기는 어디가고, 찍소리 않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범생이과가 되었다. 모름지기 세상에 한번 났으면 나처럼 남극에서 빙하라도 타고 미지의 세계에 도전해보겠다는 패기가 있어야지, 그저 학교 집 학원 다시 학교를 돌면서 재미없게 일탈 한번 없이 생의 가장 빛나는 청소년기를 허투루 보낸 듯 보였다. 남들이 정해놓은, 포장도로만 착실히 걸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어멈이 당장은 기특할지 모르나 저러다 자기 색깔을 못 찾을까 걱정이 됐다. 소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지는 수동적인 제도권 교육이 끝난 후 그제서야 뒤늦은 자아를 찾네 어쩌네, 늦은 사춘기가 왔네 마네 할게 뻔할텐데.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은 오래지 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졸업하고 시작한 평이한 직장생활, 반복되는 일상이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진짜 어른이 되고 싶다느니, 나를 찾겠다느니 부어터진 얼굴로 지내더니 홀연히 퇴사를 지르고 여행을 다녀오질 않나, 고시공부를 하겠다고 신림동에 들어가질 않나 이리저리 방황하는 듯 보였다. 대학원까지 기웃거리며 온갖 시행착오를 하며 이십대를 보내더니 결국 어떤 회사에 안착해서 다시 정 붙이고 다니는가 싶어 한창 일에 탄력이 붙을 때, 이번엔 남자를 데려온다. 서른을 훌쩍 넘기기 전에 결혼을 해야겠단다. 얘는 무슨 인생에 시기별로 정해진 숙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튼 그래도 둥글둥글하니 남자는 믿음직스러보인다. 어쨌든 뭐 둘이 좋다니 됐지.
그리고 한 동안 나는 어멈의 친정집 옷장 속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었다. 어느 날 문이 빼꼼 열리더니 왠 아기가 날 꺼내든다. 그가 한창 물고 빨고 하는 통에 이미 빠질대로 빠진 내 솜뭉치가 다 달아날 지경이다. "아가~ 지지!!” 하고 득달같이 달려오는 어멈, 오랜만에 본 어멈의 얼굴은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듯 꽤나 피곤해 보였다. 직장 다니랴, 아이 키우랴, 툭 하면 잡히는 해외 출장에 시터 구하기도 힘들다며 침을 튀기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경력단절, 경단녀 되든 말든 모르겠고 일단 회사를 그만둔단다. 왠일이지?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저지르는 건 어멈답지 않은데,
그 뒤로 정말 회사를 때려쳤는지 어멈은 아기와 함께 부쩍 자주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놀랍게도 한결 편안해 보인다. 그래도 사회생활을 영 꽝으로 한 것은 아닌지 프리랜서로 일도 한단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소셜....인지 임팩트인지 뭔지 하는 회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아무리 옆에서 설명을 해줘도 당최 나는 잘 이해를 못하겠지만 어쨌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을 돕는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멈의 진로다. 그래서 그런가, 뭐랄까 이제 어멈의 얼굴에 좀 여유란게 비친다. 이것저것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발그레 생기 넘치던, 어멈을 처음 만난 여덟 살 소녀시절 얼굴이 보인다. 행여 남들 눈에 뒤쳐질까 종종걸음치던 어멈이 이제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겠단다. 세상이 정해 놓은 인생의 과제와 시간표, 그거 꼭 때 맞춰 지켜야 하는 게 아니란 것, 이제는 좀 알겠니. 근데 어멈아, 거기서 일하면 내 고향 남극 빙하 녹는 거, 그거 해결해 줄 수 있는 거냐?
inspired by [나는 강아지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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